4.
우선 기존의 현상 물리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20세기에 정립된 양자역학에 관한 지배적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전자는 파동함수로 상태를 서술할 수 있는데, 측정되기 전에는 여러 상태가 확률적으로 겹쳐있는 상태(중첩, superposition)로 표현되고 관측을 진행하면 그와 동시에 파동함수가 붕괴하면서 단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양자역학은 '측정할 때 측정 대상과 측정 장치의 계 내부에서 물리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측정하면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알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이를 '측정 문제(measurement problem)'라고 한다. 이는 양자역학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처럼 측정 문제는 "측정으로부터 계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을까?"에 관한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양자역학에서 두 개의 계인 측정 대상과 측정 장치의 상호작용을 통해 측정 장치에서 직접 감지할 수 있는 속성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재생될 수 있을 때 이 상호작용을 측정 대상에 대한 측정이라 한다. 어떤 변수에 대해 측정을 하고 바로 뒤이어 그 변수를 다시 측정하는 상황을 생각할 때 첫 번째 측정이 일어나기 전에 임의의 양자 이론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 첫 번째 측정에서는 그 예측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측정의 정의로부터 두 번째 측정에서는 앞에서의 예측과는 달리 이미 나온 측정 결과가 반복되리라는 예측을 하게 된다. 이 경우 파동함수를 기대값의 목록으로 본다면 측정의 과정에서 함수가 불연속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따라서 측정은 함수의 연속적인 시간적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을 따르지 않고 측정 결과에 따라 서술되는 전혀 다른 변화를 겪는다. 그렇다면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변화는 물리적 변화일까? 측정에 따른 기대값 목록의 불연속 변화는 필연적이다. 측정이 의미를 가지려면 여하튼 측정값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불연속적 변화는 인과적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고 측정된 값에 따라 달라지며 측정된 값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 변화에는 일종의 지식의 손실이 생기지만 지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상이 변화해야 하며 이는 예측할 수 없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측정이 비록 인과적이고 연속적인 법칙으로 서술될 수는 없더라도 측정 대상과 측정 장치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측정 이전의 파동함수가 말해 주는 기대값 목록과 측정 이후의 기대값 목록이 다르기 때문에 서술자의 지식이 달라지는 것도 분명하다. 이때 우리는 대상은 그대로인 채 서술자의 지식만 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대상 자체가 달라지는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부분계들 사이의 관계이고 측정에서 일종의 지식의 손실이 일어나지만 실제로 지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상이 변화해야 한다.
자,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 측정 문제의 근본 원인은 바로 서구 과학적 패러다임 자체에 있다. 살아 움직여 운동 변화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인 자연 그 자체, 즉 측정 대상 물질 그 자체의 내재적 속성에 따른 운동 변화를 과학의 대상으로 하지 않고, 일부 드러난 '자연 현상'을 관측하여 불변의 것으로 포착한 후 그 관측량을 물리량으로 하여 그 시간적 변화 관계를 미분 방정식으로 기술하는 서구 과학적 패러다임에 따른 현상 물리학의 지식 체계에서는, 대상 물질을 측정했을 때 그 측정 장치와 측정 대상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알지 못하고, 또 그 상호작용을 통해 측정 대상이 어떻게 운동 변화하는지 알고 싶어도 지식 체계상 결코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불변의 세계인 플라톤의 이상적 수학 세계의 구현(물리법칙을 불변의 미분방정식으로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서구 과학적 패러다임에 따른 현상 물리학의 지식 체계에 따른 양자역학은 그 지식 체계상 측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측정 장치와 측정 대상 사이의 물리적 상호작용으로 인한 두 양자계 그 자체의 내재적 속성에 따른 운동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물리법칙(이는 '실체 물리학적 물리법칙'이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측정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불변의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된 현상 물리학적 물리법칙으로는) 결코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20세기 현상물리학에 따른 양자역학에서의 성공적인 수학 아래에 놓여진 '측정 전·후에 대한 설명들은 파동이자 입자라거나 관찰 행위가 현실을 정의한다거나 심지어 우주가 끊임없이 무한한 대체 현실로 분할되고 있다는 등 참으로 정상적인 사유와 인식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에 담을 수 없는 기괴한 이야기들의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다. 현상 물리학의 지식 체계에서 볼 때 이중 슬릿 실험의 이상한 결과는 현실의 본질에 대한 이상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의 창시자인 보어(N.Bohr)와 하이젠베르크(W.Heisenberg)는 양자 실험의 이상한 결과를 해석하는 데 있어 모든 고전적 사고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들은 심지어 보른(M. Born)의 확률 해석을 수용하여 "파동함수가 '물리적인 파동'이 아니라 '추상적인 확률의 분포'이고 측정이 없으면 관찰되지 않는 우주는 측정을 통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상태의 가능성의 집합일 뿐이며, 측정할 때 근본적인 무작위성이 입자의 특성을 결정한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물질의 파동과 입자 같은 성질 사이에 신비로운 이중성(양자 중첩)이 필요했다.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측정 또는 관찰이라는 상호작용의 결과는 무작위이다. 동일한 초기 조건에서 다른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초기 조건을 기반으로 상호 작용의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전자와 같은 입자는 측정할 때까지 특정 위치, 속도 또는 경로를 갖지 않는다. 대신 전자는 무언가와 상호 작용(측정)하는 순간까지 가능한 모든 상태가 공존하는 일종의 중첩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측정하는 순간까지 특정 위치에서 전자를 찾을 확률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양자 상호 작용의 결과는 불확정적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모두가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펜하겐 해석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양자 물체가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이거나 확률적이지 않으면서도 파동과 입자 같은 행동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완전한 물리적 이론이 필요했다.
5.
이와 관련하여, 측정될 경우 두 세계 중 하나는 붕괴한다는 코펜하겐 해석이나 측정으로 하나의 상태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중첩 상태로 나누어진다는 다세계 해석 등과 같은 아이디어와는 현저하게 다른, 양자역학에 대해 거의 완고하게 물리적으로 남아 있는 한 가지 해석이 있었다. 그것은 물질의 이중성과 물질파 이론을 처음 제안했던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에게서 나왔다. 드 브로이는 "양자 물체가 비실제 파동과 실제 입자 사이에서 신비한 방식으로 전환될 필요가 없다"고 추론했다. 실제 입자를 실제 파동이 안내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바로 '파일럿 파동 이론(1927)' 아이디어다. 여기에서 파동함수는 어떤 것의 실제 파동을 설명한다. 에르빈 슈뢰딩거도 이러한 파동함수를 생각하며 양자역학의 기본 방정식인 파동방정식을 만들었었다(1926). 이 파동은 항상 명확한 위치를 갖는 실제 점 모양 입자의 움직임을 안내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파일럿 파동이론의 파동함수가 공간과 시간에 걸쳐 어떻게 변하는지 알려주는 모든 양자역학의 핵심 방정식인 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라 정확하게 전개된다는 점이다. 이는 곧 파일럿 파동이론이 슈뢰딩거 방정식을 따르는 다른 종류의 양자역학과 동일한 기본 예측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일럿 파동은 한 쌍의 슬릿을 통과할 때 간섭 패턴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물결 모양의 모든 작업을 수행한다. 입자는 파동에 의해 형성된 경로를 따르기 때문에 결국 해당 패턴에 도착하게 된다. 파동은 가능한 궤적의 세트를 정의하고 입자는 해당 궤적 중 하나를 사용한다. 그러나 경로 선택은 코펜하겐 해석 등 여타 해석에서와 같은 무작위가 아니다. 특정 지점의 정확한 입자 위치와 속도를 알면 전체 미래 궤적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가설적 예측 가능성은 파일럿 파동 이론이 완전히 결정론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드브로이의 파일럿 파동이론은 양자역학에 대한 완전하고 일관된 해석 중 '가장 견고하게 물리적'이고 심지어 평범하기까지 한 이론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가장 덜 정통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세계가 양자 현상의 바탕에 있다는 '숨은 변수( hidden variables)'를 포함하고 있어서 지금까지의 서구 과학적 패러다임에 따른 관측을 전제로 하는 현상 물리학의 지식 체계에는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관측 할 수 없는 세계가 양자 현상의 바탕에 있다는 숨은 변수 이론의 시원은 코펜하겐 해석이 나온 당시(1927년, 제5차 솔베이 회의) 그것을 반대하는 대안 해석으로 주장했던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의 '파일럿 파동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드브로이는 전자의 위치와 궤도는 명확히 알 수 없다는 확률론에 기초한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하면서 전자가 정확한 위치와 궤도를 갖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파일럿 파동 이론은 간단히 말해 파동이 먼저 달려가서 모든 길을 탐색하고 그 길 중에서 하나를 입자가 따라간다는 이론이다. 즉, 파동이 공간을 통해 흐르면서 입자가 갈 수 있는 모든 경로를 탐색하여 입자에게 길을 인도(pilot)하고, 이중 슬릿 실험의 대상인 전자는 항상 특정 위치를 점유하여 특정 경로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일럿 파동이론에서 전자는 항상 명확한 위치와 궤도를 가지고 있는 존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드브로이의 이러한 대안 해석은 주장 당시 자연 현상의 관측을 전제로 하는 서구 과학적 패러다임에 따른 현상 물리학적 지식 체계에 반하는 '숨은 변수' 를 가졌기 때문에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잊혔다가(※그러나 당시 슈뢰딩거는 숨은 변수 이론인 드브로이의 해석을 지지했고, 나중에는 비국소적 숨은 변수에 의한 양자 얽힘이라는 기술적 서술 개념을 고안하기도 했다), 1952년 데이비드 봄(D. Bohm)에 의해 부활했다. 그래서 드 브로이의 파일럿 파동이론은 ‘드 브로이-봄 해석’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데이비드 봄의 연구마저 혹평했다. 아인슈타인은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데이비드 봄이라는 친구는 25년 전에 드브로이가 그랬던 것과 같은 연구를 하고 있더군, 그런 것은 이론이라기보다 아이들을 위한 과학 동화에 가깝지”
사정이 이러하므로 1930년 노벨 물리학 수상자 드브로이는 주류 물리학자들의 비판에 못이겨 주류적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브로이는 양자역학의 해석에 관한 데이비드 봄의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현재의 지식을 넘어서는 거대하고 새로운 영역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